“밥에 무슨 맛이 있겠어?” “밥은 ‘무(無)맛’이야.” “밥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이중 하나에라도 동의한다면 당신은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쌀이 흰색이어서 맛도 백지처럼 비어 있을 것 같지만 쌀밥에는 제법 많은 맛이 담겨 있다. 솥뚜껑을 열면 코앞으로 확 달려드는 구수한 냄새, 입에 넣고 깨물면 혀에 닿는 우아한 달콤함, 이와 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탱글탱글한 식감, 한참을 씹으면 혀 밑으로 배어드는 진한 단맛, 몇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담백함, 그리고 말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그리운 맛까지. 물론 세상의 모든 밥이 다 이런 맛을 내지는 않는다. 제대로 생산한 쌀로 제대로 지은 밥만이 낼 수 있는 맛이다. 농협과 농민신문사가 선정한 ‘쌀밥이 맛있는 집’에 가면 ‘제대로 지은 밥’ 맛을 볼 수 있다.
구수하면서 달콤하고 탱탱한 쌀밥
‘쌀밥이 맛있는 집’ 1호 ‘포도나무’는 복잡다단한 밥맛을 고스란히, 제대로 내는 집이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주문하면 예닐곱가지의 정갈한 반찬으로 상이 채워지고, 뒤이어 무거운 냄비를 든 사장님이 등장한다.
“뭘까?” 이런 호기심은 이내 해소된다. 쌀밥이다. 불에서 방금 내려왔는지 뚜껑을 열자마자 하얗게 올라오는 김과 함께 밥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훅 날아온다. 한김 나간 뒤 드러난 쌀밥은 눈처럼 희고 햇빛처럼 반짝인다. 주걱으로 살살 저으니 한알한알 살아 있는 밥알이 떼구르르 굴러갈 것만 같다. 어느새 혀 밑에 침이 고여온다.
“우리 집은 점심에는 짱뚱어탕, 저녁에는 홍어가 많이 팔려요. 그런데 사실 우리 집을 찾는 손님 대부분은 이 밥을 먹으러 와요. 주변 사람들을 데리고 오면서도 ‘이 집은 밥이 맛있어’라고들 하시죠. 그래서 우리 집의 실질적인 주메뉴는 밥이에요. 제가 가장 많이 공을 들이는 부분도 밥이고요.”
20년째 밥집을 하고 있는 이화숙 ‘포도나무’ 사장의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평일 점심시간, 식당을 꽉 채운 손님들이 주방을 향해 끊임없이 요청하는 것은 밑반찬도 국도 아닌 밥이다. 이 집에 와서 밥을 한공기만 먹고 가는 사람을 찾기가 오히려 어려울 정도다.
‘포도나무’의 밥이 이처럼 맛있는 이유는 허탈할 만큼 간단하다. 매번 새로 지은 밥을 내놓는 것. 매일 아침 새로 밥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손님이 주문을 할 때마다 새로 밥을 짓는다는 뜻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물었더니 단순하고도 당연한 답이 돌아왔다. 맛있으니까.
“제가 식은 밥을 못 먹어요. 안 먹죠. 맛이 없으니까. 나도 그런데 손님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래서 번거롭고 힘들어도 매번 밥을 새로 해서 내요. 밥집인데 밥이 맛있어야죠.”
언제 가도 갓 지은 냄비밥이 있는 곳
이 집의 밥은 냄비밥이다. 5~6인분 나오는 냄비에 밥을 하는데, 상을 새로 차릴 때마다 새 냄비가 나오고 이 사장이 손수 밥을 퍼준다. ‘눈으로 먹는다’고 했던가. 눈앞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밥을 푸는 광경을 보는 순간 밥은 이미 맛있다. 물론 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한입 떠먹는 순간 탱글탱글하고 달콤하고 구수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은 밥뿐이다. 다른 반찬은 안중에 없다.
이 기막히게 맛있는 냄비밥은 사실 이 사장의 땀과 시간의 소산이다.
“압력솥에 밥을 하면 어떤 쌀로 해도 윤기가 자르르 흘러요. 그런데 냄비밥은 달라요. 정말 좋은 쌀을 쓰지 않으면 밥맛을 내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냄비밥에 맞는 쌀을 찾느라 오랫동안 애를 썼어요. 그 결과 지금은 전남 영암의
<달마지쌀골드>
를 쓰고 있어요.”
쌀이 좋다고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냄비에 밥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삼층밥’이 되기 십상이었다.
“처음부터 잘한 것은 아니었어요. 시행착오도 많았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더니 이제 우리 집의 대표 메뉴가 됐어요.”
이 사장은 지금도 밥 짓는 일만큼은 직접 한다. 최고로 맛있는 밥, 항상 맛있는 밥을 내놓기 위해서다. 10년째 사용하고 있는 냄비는 얼마나 불에 많이 올렸던지 나무 손잡이가 타들어가는 바람에 굵은 철사로 칭칭 동여매두기까지 했다. 이처럼 이 사장이 밥맛에 집착하는 것은 그게 곧 어머니의 맛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던 밥이에요. 그 맛을 잊지 못해 냄비밥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손님들도 어머니의 맛이 그립지 않겠어요?”
마지막 한톨까지 싹 쓸어먹고 나면 나오는 구수한 누룽지는 냄비밥이 주는 덤이다. MSG 범벅인 음식에 질렸다면, 자극적인 맛이 지겹다면, 도대체 밥맛이 뭔지 궁금하다면 ‘포도나무’로 가보자. ☎02-732-1220.
이상희 기자 montes@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