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밥상] 입안 가득 바다의 맛 ‘키조개’…봄날의 호사, 부둣가에서 누려볼까
[향토밥상] 충남 보령 오천항 ‘키조개 요리’ 국내 최대 주산지…5월까지가 제철 한곳에서 자라 관자 크고 부드러워 두루치기 등 다양한 요리에 어울려 싱싱함 한상 가득…쫄깃한 식감 일품
충남 보령 북부에 있는 아담한 항구 오천항. 잔잔히 이는 파도 너머로 어민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부둣가에 늘어선 어선은 한층 분주해진다. 서해의 별미 키조개가 맛있어지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오천항은 우리나라의 키조개 최대 산지다. 그 명성을 자랑하듯 이곳에선 커다란 패각 속 뽀얀 조갯살을 회부터 구이·볶음·탕까지 다양하게 요리해 먹는다.
키조개는 다른 조개류와 섞여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크기와 모양이 남다르다. 껍데기 길이는 30∼35㎝로 압도적이며 모양은 부채처럼 길쭉한 삼각형이다. 옛날 곡식을 까부르던 농기구인 ‘키’와 닮아서 이름도 키조개로 붙었다. 색깔은 흑갈색에 오묘한 진줏빛 광택이 돈다.
키조개는 수심 30∼50m 아래 진흙밭에 박힌 채로 무리 지어 서식한다. 국내에선 오천항 해역이 자연산 키조개의 주산지며, 전남 장흥 등 남해안에선 자연산 치패(어린 조개)를 수심 약 10m의 바닷속에서 키워 생산한다. 키조개는 크기만큼이나 타우린·칼슘 같은 성분이 풍부하다. 특히 호르몬 작용과 면역력 증진에 도움이 되는 아연 함량이 높다.
키조개가 가장 맛있는 때는 설이 지나고부터 산란을 앞둔 5월까지다. 7∼8월 산란기가 지나면 살이 비교적 질겨지고 맛이 덜하다. 키조개라 하면 관자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관자는 껍데기를 여닫는 근육으로 ‘조개관자’ ‘패주’라고도 한다. 키조개는 다른 조개와 달리 이동하지 않고 한곳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관자를 크고 부드럽게 키울 수 있다. 우리나라 키조개 관자는 유난히 하얗고 투명해 일본에선 한국 것을 최상으로 쳤다. 1990년대까진 오천항의 키조개는 전량 일본으로 수출돼 국내에서 맛보기 힘들 정도였다.
키조개는 잠수부들이 직접 채취한다. 키조개 어선은 물고기 어선과 반대로 물살이 가장 약한 조금 때 바다로 나간다. 작업할 땐 선장·기관장·잠수부 3인이 한 조로 움직인다.
잠수부는 기다란 산소 호스를 물고 바닷속 최대 60m까지 내려간다. 깊이 들어가는 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과거엔 잠수부가 백상아리한테 공격을 받는 일도 해마다 한두번 있었다. 채취한 키조개는 껍데기째로 해수에 담그거나 손질한 관자만 급랭해 유통한다. 하지만 바다에서 바로 채취해 싱싱하게 먹는 맛에 비할까. 그러니 이 봄, 오천항으로 향할 수밖에.
오천항 부둣가를 따라 늘어선 식당엔 저마다 제철 맞은 키조개가 커다란 붉은색 고무 대야에 갓 잡힌 채로 쌓여 있다. 이곳에선 고급 식재료로 손꼽히는 키조개를 다양한 요리로 만날 수 있다. 식당 뒤로 나란히 정박한 어선을 보니 기대감은 더욱 커진다. ‘오천항수산물센터 2호점’에선 남편이 채취한 키조개를 아내가 요리해 코스로 선보인다. 식당 주인 심지용씨(63)는 아기 얼굴만 한 키조개를 꺼내서 껍데기 사이에 칼을 밀어 넣더니 쩍 갈라 보였다.
“크죠? 그런데 여기서 내장은 다 빼고 하얀 관자랑 그 위의 날개살, 끝의 꼭지살만 먹어요. 내장을 깨끗이 떼고 먹으니 탈 날 이유도 없죠. 관자를 요리할 땐 흐르는 물에 씻어 겉에 있는 얇은 막을 떼어낸 후 얇게 썰어요. 그래야 식감도 부드럽고 열을 가해도 강낭콩 모양 그대로 예쁘게 유지됩니다.”
심씨처럼 보령 토박이 어민들에게 키조개는 익숙한 별미다. 된장찌개에 큼지막한 조갯살을 넣어 시원하게 먹고, 날개살·꼭지살·관자를 잘게 잘라 간장에 조리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도시락 반찬이 된다. 키조개와 각종 채소를 고추장 양념에 볶아 먹는 두루치기가 밥상에 오르면 밥 한공기는 게 눈 감추듯 비울 수 있다. 심씨는 “요즘 사람들은 버터구이로 많이 찾지만, 관자는 들기름에 살살 볶아 먹는 게 가장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입안의 호사를 누려볼까. 키조개 한상을 주문하니 회·무침·버터구이·두루치기·샤부샤부가 연달아 나온다. 신선한 관자를 회로 먼저 맛본다. 초장이나 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니 비린맛 없이 부드럽다. 채소와 함께 초고추장 양념에 버무리면 키조개회무침이 된 다. 이제 익혀서 먹어볼 차례. 깍둑썰기 한 버터 한덩이를 철판에 녹인 후 관자와 버섯을 굽는다. 버터를 머금은 관자의 바닥이 노릇노릇 갈색을 띠면 바로 뒤집고 불을 끈다. 너무 많이 익히지 말고 촉촉하게 먹어야 맛있다. 철판에 볶은 돼지두루치기는 많이 먹어봤지만 키조개두루치기는 초면이다. 첫입엔 양념맛이 나지만 끝엔 바다향이 스쳐 지나간다. 마지막은 배추·미나리 등을 넣은 뜨거운 육수에 키조개를 잠깐 넣었다 빼먹는 샤부샤부. 별다른 조미료 없이도 조개에서 우러난 육수가 아주 시원하다. 진한 육수에 끓인 칼국수는 마무리로 좋다.
제철 음식은 그 계절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드는, 다시 기다리게 하는 이유가 된다. 올봄, 오천항 키조개로 새로운 기억을 써보는 건 어떨까.
보령=김보경 기자 bright@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