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나무, 초봄에 꽃 남아도 겨울의 시작과 함께 피어나고 계절 끝자락에 저무는 ‘겨울꽃’
한·중·일서 다양하게 불렸지만 ‘동백(冬柏)’은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불러온 고유의 이름
오랜만에 펑펑 쏟아진 첫눈도 경험했고 이제 꽃구경이 가장 어려운 시기인 겨울이다. 영하의 기온에선 꽃잎처럼 연한 조직들은 견디기 어려워 겨울은 꽃이 없는 계절이지만 이름에 겨울꽃임을 공포하고 있는 나무가 있는데 바로 동백(冬柏)나무다.
세상에는 수백종류의 다양한 빛깔과 크기, 꽃잎을 가진 화려한 동백 품종들이 존재하지만 내게는 이 땅의 붉은 동백이 가장 마음을 흔든다. 반질반질 진한 초록빛과의 대비, 적절하게 벌어져 단정한 꽃잎 사이로 보이는 샛노란 수술은 시선의 마침표를 찍으며 곱디 곱다.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기품 있는 수피에 지난해 맺은 열매들이 동글동글하게 씨앗을 매달고 있는 모습이 보태져 즐거워진다.
동백나무를 두고 맨 처음 가졌던 궁금증은 ‘봄에 꽃이 피는데 왜 겨울나무가 됐을까?’였다. 전북 고창 선운사를 비롯해 그간 보았던 동백나무는 이른 봄까지 꽃구경이 가능하니 말이다.
그러던 중 운이 좋았던 12월의 어느 날. 거문도의 바닷가에서 그 꽃잎 위로 흩날리는 흰 눈송이가 올라앉은 천상의 모습을 만나고 난 후부터는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겨울풍경의 하나가 됐다. 그렇게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에 피어난 동백꽃은 겨우내 조금씩 올라와 이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끝쯤에 와서는 송창식의 ‘선운사’란 노래 가사처럼 그 선연한 붉은 꽃송이들을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뜨리고는 겨울을 마감하는 것이다. 온전하게 겨울을 사유하니 겨울꽃이 맞다. 나 같은 의문점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지, 이 나무에는 춘백(春栢)이라는 별칭도 있다.
나무 공부를 조금 더 하며 생긴 두번째 궁금증은 <본초강목>을 비롯한 <양화소록>이나 <임원경제지>와 같은 옛 문헌에선 동백을 두고 산다(山茶)라고 부르는데 어떤 이름이 더 먼저 쓰인 것인지, 동백과 다른 산다라는 나무가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이름의 나무는 같은 것이고, 이 두 이름 말고도 이웃나라들 사이에는 혼동돼 쓰이는 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동백’이란 이름만은 예부터 불러오던 우리나라만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동백나무를 두고 일본에서는 스바끼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춘(椿)으로 쓴다. 재미난 것은 같은 한자 ‘椿’이 일본에서는 동백나무 ‘춘’이지만, 우리나라 옥편에는 참죽나무 혹은 가죽나무 ‘춘’이라는 점이다. 이런 혼동 속에서 나타난 에피소드가 유명한 오페라인 <라트라비아타>다. 이 오페라는 처음 우리나라에 <춘희(椿姬)>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주인공 비올레타가 동백꽃을 달고 나와 일본에서 ‘동백나무 아가씨’란 뜻으로 붙인 제목이다. 일본 사람들이 쓴 ‘椿姬’라는 한자를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가져와 썼는데, 그러다보니 ‘춘희’를 우리나라 식으로 풀이하면 동백나무 아가씨가 아닌 ‘참죽나무 아가씨’가 되고 마는 것이다. 참죽나무의 꽃은 아름답고 화려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동백나무를 두고 이는 혼란이 하나 더 있다. 김유정의 <동백꽃>, 정선아리랑의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지네’ 등에 나오는 동백인데 이는 우리가 아는 붉은 동백이 아니라 이른 봄에 피는 샛노란 꽃을 가진 생강나무다. 식물학적으로는 무관한 생강나무를 그리 부른 이유는 쓰임새 때문이다. 예전 동백나무는 씨앗에서 기름을 짜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하지만 추워서 동백나무를 키울 수 없는 경기도와 강원도 이북에서는 역시 기름을 짜는데 긴요했던 생강나무를 산동백·올동백 등으로 불렀던 것이다. 역시 전혀 다른 쪽동백나무에 동백이란 두 글자가 붙은 연유도 같다.
난 왜 이렇게 이름에 집착할까! 내가 공부한 식물분류학에서 다루는 일의 하나가 그 식물종의 실체를 정확히 밝혀내고 그에 따른 적절한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 식물(혹은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기도 전에 잘못된 이름의 한계에 갇혀 생기는 오류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일을 정리해나간다고 해서 유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쓰고 평가받을 수도 없지만, 그래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에서 모호한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함께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다.
이유미는…
▲국립수목원장(산림청 개청 47년 이래 첫 여성 고위공무원) ▲저서 <우리 나무 백가지> <한국의 야생화>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내 마음의 나무 여행>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