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면>전원해의 풍수와 명당(23) 경기 화성 용주사 : 효심ㆍ불심 어우러진 명당
용주사(龍珠寺·경기 화성시 송산동)는 곳곳에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의 숨결이 서린 곳이다. 원래는 신라 때 창건된 갈양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고찰. 고려 때는 왕의 후원으로 대대적으로 중건되기도 했으나 조선 후기 병자호란 때 불타 폐사됐던 것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 화성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願刹·망자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삼았다. 정조가 처음 원찰을 짓고자 터를 물색할 때 신하들이 사도세자를 모신 현릉원(나중에 ‘융릉’으로 승격됨)과 가까운 갈양사 옛터가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고 추천했다고 한다.
임금이 손수 일으킨 사찰인 만큼 전하는 이야기도 많다. 정조는 총애하던 단원 김홍도를 보내 용주사 중창 일을 맡겼다. 지금도 용주사에 남은 단원의 손길이 부모님 은혜를 설법하는 불교경전
<부모은중경>
을 그린
<부모은중경판>
이다. 사찰 이름도 낙성식 전날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는 용주(龍珠)라 했다고 한다. 아버지(용)의 복권을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이다.
용주사의 조산은 칠보산이고, 주산이자 현무봉은 성황산이다. 주산인 성황산의 오른쪽으로 내려온 백호줄기는 중간에서 한번 솟구치며 작은 봉우리를 만든 후 용주사의 오른쪽을 감싸며 내려가 용주천을 만나 멈춘다. 용주천은 화산저수지로 들어간다. 반대편인 왼쪽 청룡줄기는 용주사를 왼편에서 잘 감싸안고 내려온 다음 용주사 앞에서 나지막한 안산이 되어 생기를 감싼다. 이 청룡줄기와 함께 내려온 물줄기도 화산저수지로 들어간다. 좌우 물길이 합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오른쪽 백호줄기가 짧아 안쪽에 있고 왼쪽 청룡줄기가 길게 바깥으로 감아서 안은 모양을 청룡국세(靑龍局勢)의 지형이라 해 명예와 명성을 얻는 자리로 본다. 또한 용주사는 명당수인 화산저수지가 있어 배산임류(背山臨流)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지형으로, 풍수상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백호줄기가 짧은 것. 이 때문에 효행박물관 등의 건물을 세우고 나무를 심어 비보했다.
시야를 좀 더 넓히면 용주사는 사도세자를 모신 융릉, 정조가 잠든 건릉과 함께 하나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주변의 여러 산이 용주사와 융릉·건릉을 겹겹이 에워싼 모양이 마치 꽃봉오리 속에 있는 듯해 화심형(花心形)이라고도 한다.
지금 용주사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신위가 각각 봉안돼 있다. 오늘날 ‘효행의 본찰’이라 일컬어지는 이면에는, 당시 조선의 지배이념인 주자학을 신봉하면서도 부친의 명복을 비는 일은 불교의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정조의 인간적 면모가 서려 있다. 또 하나, 왕조의 중흥을 꿈꾸던 정조의 열망도 읽을 수 있다. 그 꿈은 미완에 그쳤으나 유산만은 값지게 남았다. 당시 현릉원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수원화성이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풍수연구가>